불가리아 인민 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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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소련의 압력으로 불가리아 왕국이 폐지되면서 등장했다.
불가리아 인민 공화국은 발칸 반도에서 가장 러시아와 밀접한 관련을 가진 국가였으며, 동유럽 블럭 중에서도 무역총액 중 소련과의 무역이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유일한 나라였다. 오죽했으면 소련과 불가리아의 우애를 주제로 한 군가 ("불가리아 - 러시아")까지 나올 정도였다. 이웃 나라인 그리스나 터키에서는 때로는 민주정부가 때로는 군사독재정부가 들어서고, 루마니아나 유고슬라비아는 개인의 통치 하에 소련과는 독립적인 정치를 했지만, 불가리아는 러시아에 거의 종속되다시피 했으며 역설적으로 이는 불가리아가 알바니아에 이어서 유럽에서 두 번째로 후진적인 국가에서 발칸에서 잠깐이나마 잘사는 국가로 들어서는데 도움을 주었다. 원자재나 소비재를 소련으로부터 저렴한 가격에 공급 받았기 때문이다.
한편 소련의 지원을 받은 지도자들: 디미트로프/체르벤코프/지프코프에 이르기까지 역대 공산당 수뇌부들은 매우 억압적, 보수적이고 안정된 통치를 했다. 불가리아인들은 중앙 유럽의 공산주의 위성국가(동독, 체코슬로바키아, 헝가리, 폴란드) 인민들이 소련에 대항해서 자유화 운동을 진행하고 있었을 때도 그런 움직임이 거의 없었을 정도로 공산정권에 충성을 바쳤으며, 그 구조는 어찌 보면 전형적인 현실사회주의국가가 아닌 전통적 봉건국가에 가까웠다. 정권도 공산당 내 반대파들의 쿠데타로 무너졌다.
2. 역대 국기
3. 역사
1944년 소련군이 불가리아로 진입하자 불가리아 공산당이 정권을 잡았으며, 대량 숙청을 거쳐 1946년 9월 15일 당시 9세였던 시메온 2세를 몰아내고 인민 공화국을 선포했다. 초대 서기장은 게오르기 디미트로프가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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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미트로프가 1949년 사망하자 유해를 엠버밍처리하고 영묘를 조성했는데, 불가리아가 민주화되면서 유해는 화장되었고, 영묘 자체도 1999년에 헐리게 된다.
발코 체르벤코프의 뒤를 이어 1954년 집권한 토도르 지프코프는 불가리아의 공산주의 독재자로 공산체제가 무너진 1989년까지 무려 35년간 장기 집권을 했다. 1955년에는 국제연합에도 가입했으며, 1971년에는 지프코프 헌법을 채택해 민주화 때까지 사용한다.
공산국가 시절에 지프코프 정권이 친소정책을 유지하면서 소련이 주장한 '사회주의 국제분업'에 적극 협력해 농업 성장에 집중했다. 소련,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동독은 중화학 공업을 집중 육성하고, 헝가리는 경공업을 집중 육성하고, 나머지 나라들은 원료 생산을 집중 육성하는 것이다. 당연히 다른 친소 사회주의권 국가에서 대반발이 일어났다. 대표적인 반발 국가가 북한과 루마니아. 불가리아는 농업을 집중 육성하는 국가로 지정되었는데 이 계획을 정말 열심히 수행했다. 그래서 지금도 먹는 것 하나는 풍족하고 먹는 것에 한해 물가도 크게 저렴하다.
여하튼 이 시기에 상당한 경제성장을 이룩하면서 그럭저럭 먹고사는 나라가 될 뻔 했지만 소비재의 질이 낮다는 문제점이 상존했다. 당시 불가리아는 이탈리아 다음으로 남유럽에서 잘 살던 나라였다. 덕택에 1970년대 들어서 상당한 액수의 외채를 빌리게 되는데 1980년대 경제 침체의 근본적인 원인이 되었다. 이 시기 불가리아는 소련의 16번째 공화국이라는 비아냥을 들을 정도로 소련과의 관계가 밀접했다. 지금도 러시아와 관계가 나쁜 건 아니지만 공산주의 시절에 비하면 미적지근한 상태. 다만 이 시대에는 불가리아 정부가 자국내 소수 민족인 터키인들을 탄압하고 이들을 터키 국경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여담으로 이들은 1989년 평화적으로 시위를 했으나 탄압당했다.
1989년 동유럽 혁명으로 지프코프는 실각했고, 페타르 믈라데노프가 집권하면서 다당제를 도입하였으며 불가리아 공산당도 사회당으로 당명을 바꾸어 오늘날 불가리아가 된다.
여담으로 지프코프는 공산주의 정권이 붕괴된 이후 한 때 체포되기도 했지만, 건강 악화를 이유로 연금 상태로 사는 것이 허락되었다. 1996년 불가리아 대법원에서 면소 판결을 받았고, 1998년에 폐렴으로 사망했다. 불가리아 정부는 지프코프의 국장을 거부했다.
4. 사회
1980년대 들어서는 터키계 불가리아인에 대해 터키풍 성씨를 불가리아식으로 바꾸게 하는 '재생과정(Възродителен процес)' - 일종의 창씨개명 - 이라는 동화정책이 실시되었다. 터키계 불가리아인은 90만 명으로 인구의 10%를 차지했다. 그 결과 1989년 국경이 개방되자, 이 정책에 반대하는 30만 명의 터키계가 터키로 이주하였다.[1]
[1]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터키계 불가리아인은 여전히 적지 않게 불가리아에 남아있다. 사실상 무신론자에 가깝거나 완전히 무신론자가 된 터키계 불가리아인들, 정체성은 터키계이지만 정작 종교는 정교회인 이들은 대부분 터키로 이주하지 않고 그대로 불가리아에 남았다. 독실한 무슬림이었던 터키계 불가리아인들 또한 재생과정(창씨개명)에 대한 불만과 별개로 고향인 불가리아 땅에 대한 애착 때문에 그대로 불가리아에 남은 이들이 존재했다. 한국으로 치면 오늘날의 조선족, 재일교포, 고려인이 각각 중국, 일본, 구소련 국가들을 고향으로 여기는 것과도 비슷하다.